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송산 전투 (문단 편집) == 배경 == [[천명제|누르하치]]가 [[1616년]] 후금을 세우고, [[1618년]] 무순(撫順)을 점령한 것을 시작으로, [[명나라]]는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요동]]과 [[요서]] 지역의 대부분을 후금에게 빼았겼다. [[웅정필]]과 [[원숭환]]과 같은 명나라의 걸출한 [[명장]]들은 야전에서 후금군의 우세를 인정하고 방어적인 전략으로 후금의 공세를 저지했다. 특히 원숭환은 [[만리장성]] 동쪽 끝에 있는 [[산해관]]과 만리장성 너머의 송산성, [[진저우|금주성]] 등의 4개 성을 중심으로 하는 전진 방어 전략을 구축했는데, 요새를 중심으로 [[홍이포]] 등의 화약 무기를 이용하는 전략은 1626년 [[영원성 전투]] 등에서 그 효용을 입증했다. 태조 누르하치가 붕어하고 그 뒤를 이은 [[숭덕제|청태종 홍타이지]]는 [[1629년]] [[내몽골자치구|내몽골]] 지역으로 우회하여 만리장성의 취약한 부분이었던 [[섬서성]] 북부[* 당시의 섬서성은 [[닝샤 후이족 자치구]]와 [[간쑤성]]의 남부 지역을 포함한 넓은 지역이었다. 이 두 지역은 각각 중화민국 이후의 시대와 청나라 중기에 독립된 신설 지역이다.]와 [[산서성]] 및 [[허베이성]] 남부로 침입하여 여러차례 대규모 약탈전을 감행했다. 후금군이 명나라의 수도인 [[베이징시|베이징]]에까지 접근하자('''기사의 변''') 원숭환은 부관 조대수와 함께 20,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와서 베이징을 구원했다. 그해 말 원숭환이 모함을 받아 구금되자 조대수는 요서로 달아났는데, 원숭환은 책형(사실상 [[능지형]])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하면서도 조대수에게 옥중 서신을 보내 끝까지 명왕조에 충성을 다하라고 설득했고, 이러한 설득에 의해 조대수가 복귀했다. 한편 후금 측은 명군의 포로와 귀순자들로부터 홍이포의 제작과 사용 기술을 배울 수 있었고, 나중에는 홍이포를 자체적으로 제작하는데 성공했다. 그 다음에는 40문의 대포를 앞세워 [[1631년]] 조대수가 지키는 대릉하 요새를 포위했다. 조대수는 결국 항복했으나, 후금 측에 충성을 다하는 척하며 금주성에 항복을 권하겠다고 해놓고서는 금주성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이후 조대수는 10년간 금주를 지켰다. 후금은 [[1636년]] 칭제하고 국호를 '''대청'''으로 바꿨으며, [[1637년]] [[조선]]을 재침공하여 배후를 안정시킨 후 명나라와의 전선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병자호란]]''') [[1641년]] 초, 황족 지르갈랑(濟爾哈朗)이 지휘하는 청군 40,000명이 금주를 포위했고, 외성이 항복하자 조대수는 북경의 조정에 구원군을 요청했다. [[숭정제]]는 자신이 믿던 에이스 [[홍승주]]에게 금주를 구원하라 명령했고, 이에 홍승주는 그해 4월 [[오삼계]] 등의 장군 8명과 함께 [[화승총]], [[홍이포]] 등으로 무장한 100,000명 이상의 [[보병]] 및 40,000명 가량의 [[기병]]이 포함된 정예병력 140,000명을 이끌고 산해관을 나섰다. 명나라가 금주에 대한 구원군을 보냈다는 사실을 탐지한 청나라는 금주에 대한 포위를 풀고, 물러나는 대신에 명나라의 대규모 구원군을 요격하려고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